비운의 武將 남이장군묘.
● 목적지 :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
● 총운행거리 : 왕복 60Km
● 총운행시간 : 왕복 2시간
● 누구랑 : FT857D,FT90R,ATAS120 하고 같이
● 코스 : 안양 - 안산사리 - 비봉 - 남전리 - 남이장군지묘
● 사진 : 차량에 비치되어 있는 업무용 직찍이
남이 장군은 세조 3년(1457),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여진족 건주위 부족을 정벌할 때에도 선봉에 나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적개공신이 되고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예종 원년(1468) 유자광의 무고로 역모를 도모한다 하여 처형되었다.
순조 18년(1818)에 관직이 복귀되었고 충무의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2단으로 쌓인 석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을 중심으로 바로 앞에 상석이 위치하고 좌측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손자로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꺽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北征 (북정)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오늘도 어김없이 CQ를 냅니다. "CQ CQ CQ 여기는 HL2WJA입니다."
결국은 남이장군의 시로서 마무리 합니다. DE BEST 73!
copyright ⓒ 2012 by 風流客主
'무선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세충렬문 (0) | 2013.02.01 |
---|---|
[스크랩] 아라파크웨이(경인운하)를 다녀오다. (0) | 2012.12.16 |
[스크랩] 안곡서원(安谷書院)을 다녀오다 (0) | 2012.12.14 |
[스크랩] 수리산 중계기 보수일지 2편 (0) | 2012.10.14 |
[스크랩] 수리산 중계기 보수일지 1편 (0) | 2012.10.14 |